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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: CTS
작성일시 : 2019-03-18
조회 : 2,151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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앵커: CTS뉴스 3.1운동 100주년 특별기획 시간입니다. 3.1운동 당시 독립을 외치던 기독교인들 중 많은 사람이 옥사하거나 고문으로 짧은 생애를 마감해야 했죠.
앵커: 오늘 소개해 드릴 인물은 3.1운동 때 옥살이를 한 이후 목사안수를 받고 96세까지 목회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했다고 하는데요. 영암 김응조 목사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.
1896년 1월 23일 경북 영덕군에서 출생한 영암 김응조 목사. 13세 때 서당 훈장의 아들로부터 처음으로 예수님을 접하게 됩니다. 선친의 교육열로 어릴 때부터 신학문을 공부했던 김 목사는 성경 인물 중 모세에게 감명을 받고 모세처럼 될 것 결심합니다. 1916년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고자 한 김 목사. 그러나 규정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려 이듬해인 1917년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. 입학 후 1년간의 일본 전도여행으로 신앙의 성장을 경험하고 1918년 4월 귀국, 학업 하던 중 발발한 3.1운동. 김 목사는 학생 신분으로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며 지역으로의 운동 확산을 시도합니다.
INT 박명수 교수 / 서울신학대학교
대학생 2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며칠 뒤인 3월 5일. 김 목사는 독립 선언문을 휴대하고 고향인 경북 영덕으로 내려가다 일제에 적발됩니다. 4년 구형에 2년 실형. 선언문의 전달 대신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 겁니다. 김 목사는 1년 6개월의 실제 수감 기간 동안 성경 읽기와 전도에 힘쓰며 사역자로서의 기반을 다집니다. 마태복음부터 에베소서까지 암송했을 정도. 신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옥중에서 배운 성경이 더 많다고 증언할 만큼 극한 환경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석방 후, 본격적인 사역을 이어가게 됩니다.
전문가들은 김 목사가 선언문을 전달하진 못했지만 영덕 지방에 3.1운동의 불씨가 퍼지는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합니다.
INT 박명수 교수 / 서울신학대학교
3월 18일, 주민 3천여명이 모여 경북 지역 최대 규모로 전개된 영덕의 만세 운동의 소중한 불씨가 된 김응조 목사. 민족의 독립을 위해 내던진 헌신이 다시금 기억되고 있습니다. CTS뉴스 박세현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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